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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영화

서부극 추천 및 단평 6선 (1)

사실 아래의 작품들은 전부 동세대 평단에서 찬사를 받았거나, 크라이테리언, 유레카 등 이름난 블루레이/DVD 레이블에서 채택해 복원했을 정도로 해외에서는 그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들이기에 '숨겨진 걸작'이라는 테마를 갖다 붙이기 조금 민망한 면도 있습니다.

 

다만 국내에서 서부극이 굉장히 마이너한 장르이고, 실제로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세르지오 레오네, 샘 페킨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몇몇 대표작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하이 눈>이나 <셰인> 정도만 언급되는 정도로 언급되는 작품의 스펙트럼이 좁은 편이기에, 우선 이 글에서는 해외에선 이미 알 사람 다 알고 평단의 인정도 받은 작품이지만 국내에선 잘 거론이 안 되는 작품을 몇 가지 다뤄보고자 합니다.

 

 


<7인의 무뢰한 7 Men from Now>, 1956년작. 버드 뵈티커.

 

- 앙드레 바쟁이 존 포드의 <수색자The Searchers>와 함께 1956년 최고의 서부극으로 극찬했던 작품. 서부극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버드 뵈티커&랜돌프 스콧 콤비의 첫 작품.

 

- 버드 뵈티커 서부극은 대체로 낮은 예산과 짧은 러닝타임이 주를 이루는 편. 하지만 역으로 이를 이용해 한정된 공간과 특수한 상황, 인물간의 불안한 관계 속에서 오는 긴장감의 극대화를 이끌어 내어, 최후에는 인물간의 기묘한 관계가 불러오는 비장한 결말로 승화시키는 것이 버드 뵈티커 서부극의 특징이자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

 

- 이후 뵈티커는 스콧과 함께 총 5편의 서부극을 함께 만들었는데, 모두 좋은 작품이지만 <7인의 무뢰한>이 특별한 이유는 역시 리 마빈의 존재 때문. 특히 리 마빈이 해당 작품 최후반부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장면만큼 등장인물의 냉혹함을 드라이하게 표현한 연출은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

 

- 유명세와 평단의 평가 모두 빠지지 않는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2005년에 파라마운트에서 DVD로 출시한 이후 아직까지도 유명 레이블에서 블루레이로 복원해 출시된 적이 없습니다. 아마존 웹 버전으로 1080p 화질이 존재하긴 하지만, 위의 DVD 버전을 그냥 해상도만 업스케일링한 것으로 추정. 2018년에 영국 인디케이터 사에서 버드 뵈티커-랜돌프 스콧 컬렉션을 출시한 적이 있는데, 다른 작품들은 전부 저작권이 콜롬비아사에 있는 반면에 이 작품은 파라마운트에 저작권이 있어서 안타깝게도 컬렉션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옥스보 사건 The Ox-Bow Incident>, 1943년작. 윌리엄 A. 웰먼.

 

- 수정주의론을 내세우며 고전기 헐리웃 서부극이 전형적이며 틀에 박힌 것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짓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고전기 헐리웃 시기 스튜디오 시스템 하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영화들이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쏟아져나왔다는 점.

 

그 말은 즉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장르였던 서부극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는 뜻이고, 그런 상황에서 참신하지 않은 작품은 살아남기 어려웠음. 그만큼 서부극에서는 1950년대까지 이미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뜻인데, 실제로 허문영이나 태그 갤러거 등의 비평가, 연구가들은 후대에 '수정주의적 재해석, 재시도'라고 불리는 수많은 것들이 이미 1950년대 이전, 심지어 1910년대에도 나타났던 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음.

 

이러한 다양한 서부극 중에서는 심지어 법정 스릴러(!) 성격을 띈 서부극까지도 존재할 정도였는데, 그러한 법정 스릴러 서부극의 대표격인 작품이 바로 여기서 소개하는 <옥스보 사건The Ox-Bow Incident>. 

 

- 이 영화가 시사하는 가장 섬뜩한 점은, 배심원 제도, 다수결, 피고인 변론 등 근대 법정의 기본적 요소가 지켜진다고 해도 여전히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진정한 테마는 사형제 반대와 대중의 광기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 

 

- 사실 개인적 취향으로는 같은 감독의 서부극 중에서 덜 알려진 1953년작 <Track of the Cat>을 훨~씬 좋아하지만, 이 작품은 다음 기회에 한번 다뤄보겠습니다.

 

- 추천하는 포맷은 미국 Kino Lober에서 출시한 리전 A 블루레이와, 영국 Arrow Video에서 출시한 리전 B 블루레이.

 

 

 

<건파이터 The Gunfighter>, 1950년작. 헨리 킹.

 

- 개인적으로 서부극을 '자연과 문명의 대치'라는 단순한 이분법 구도로 나누는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실내 서부극'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배경이 황야나 대초원이 아닌 실내 스튜디오인 영화들의 존재 때문. 그런 실내 서부극 중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그 유명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이고,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숨겨진 명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 바로 이 <건파이터 The Gunfighter>.

 

- '서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 갑자기 서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설적인 총잡이가 나타난다면?'이라는 사회실험스러운 질문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영화화했다고 말해도 좋을 법한 작품. 실내서부극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철저히 마을 내에서 벌어지는 인물과 인물, 인물과 사회간의 관계, 그리고 인물의 내면적 고뇌를 조명하면서, 서부영화 역사에서도 가장 휴먼드라마적이고 사회드라마스러운 성격이 강한 작품 중 하나가 탄생. 

 

- 추천하는 포맷은 크라이테리언에서 2020년에 출시한 블루레이.

 

 

<무법자의 날 Day of the Outlaw>, 1958년작. 앙드레 드토스.

 

- 어지간한 괴짜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괴짜 소굴이었던 헐리웃에서도 단연 손꼽힐 만한 엄청난 기인이었던 앙드레 드 토스. 서부극, 호러, 스릴러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온갖 기이하고 개성적인 영화의 연출을 맡거나 각본을 썼던 드 토스 감독이 로버트 라이언, 벌 아이브스라는 두 명배우와 함께 황량한 와이오밍 설원을 배경으로 만들어 낸 숨겨진 걸작.

 

- '어? 이 테마는 보통 서부극 최후반부에서 다뤄지는 건데 왜 이 시점에?' '아니, 이 샷이 여기서 이렇게 전환된다고?' '어? 저 두 캐릭터는 일반적인 영화라면 최후의 결투를 벌여야 하는 구도인데 저렇게 흘러가네?' '아니, 이게 이런 식으로 끝난다고?'라는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당혹감, 놀라움이 끊이지 않는 작품.

 

- 그렇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진가는 의외성만이 아니라, 배경적 상황과 인물간 구도에서 나오는 자기혐오, 후회, 질투, 수치심, 욕정, 굴욕감, 두려움, 절망 등 다양한 감정이 와이오밍의 거대한 눈덮인 산맥 속에 덩그러이 놓인 작은 마을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인해 억눌리며 연출되는 절묘한 긴장감에서 나옵니다.

 

- 고전기 헐리웃 영화의 최고 장점 중 하나인, 짧은 대사 속에 많은 것을 함축한 위트있고 날카로운 대사가 많이 나오는 영화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한 마디는 "There are things worse, ma'am, than dancing with lonely man."

 

- 로버트 라이언은 <어둠 속에서 On Dangerous Ground>, <셋업 The Set-up>, <십자포화 Crossfire>, <벗겨진 박차 The Naked Spur> 등의 여러 전작에서도 묘사했던, 욕정과 자기혐오가 폭력성으로 분출되는 캐릭터를 멋지게 연기함. 또한 잔인한 무법자이면서 한편으로는 품위와 존엄성을 갖췄고, 수많은 폭력적인 무법자들을 카리스마와 위압감, 완력으로 통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저들을 억누를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들게 만드는 두목 역할을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역시 벌 아이브스. 이 두 배우가 아니면 이런 배역을 다른 배우가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절묘한 캐스팅.

 

- 추천하는 포맷은 영국 Eureka에서 Masters of Cinema 시리즈의 일환으로 출시한 리전 B 블루레이. 작년쯤에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한 적도 있으니, 나중에 또 그쪽에서 상영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부의 사나이 Man of the West>, 1958년작. 앤소니 만.

 

- 중소 제작사의 70분짜리 B급 필름 느와르를 주로 연출하던 감독에서, 메이저 스튜디오 자본으로 스타들을 기용하는 감독으로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그래서 더욱 기이한 시도가 가능했던 감독인 앤소니 만의 정수가 담긴 걸작.

 

- 장 뤽 고다르가 아직 영화감독보다는 비평가로 더 잘 알려져 있던 시절, 감독의 이름인 '만(Mann)'에서 딴 'SuperMann'이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극찬했던 작품.

 

- 인물과 배경 설정, 카메라워크, 장면의 구도, 조명, 장면의 호흡 조절, 배우의 연기 등 영화 내적인 기이함에서는 아마 여기 소개한 영화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

 

- 앤소니 만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은 역시 <서부의 사나이>이지만, 사실 그를 유명 감독으로 만든 대표적인 영화는 역시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한 5편의 서부극입니다. 이 5편 모두 좋은 영화들이고 특히 <윈체스터 '73 Winchester '73>과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 The Man from Laramie>는 마지막까지 <서부의 사나이>와 함께 어느 걸 이 명단에 넣을지 고심한 작품들이지만...역시 <서부의 사나이>가 너무 대단한 영화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 추천하는 포맷은 영국 Eureka에서 Masters of Cinema 시리즈의 일환으로 출시한 리전 B 블루레이. 앞에서 소개한 고다르의 평론도 함께 실려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이따금 상영해줬던 기억이 나네요.

 

 

<웨건 마스터 Wagon Master>, 1950년작. 존 포드.

 

- 존 포드 서부극이 과소평가되었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라는 말이 나올 법 하지만, 실제로 그런 영화가 있습니다. 

 

유타의 머나먼 사막 한가운데서, 자신의 가족, 친구, 친한 업계 동료들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크루와 함께 백만 달러도 안 되는 적은 예산으로 채 3주도 안 되는 로케이션 기간 동안 제작사의 간섭이나 흥행 압력도 없이, 순전히 감독 존 포드가 찍고 싶어서 찍어버린 지극히 사적인 영화.

 

'기병대 3부작'과 <말 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등 흥행과 비평 모두 대성공한 대작들 틈새에 앞뒤로 끼여서 오랫동안 발굴되지 못한 채 관객과 평단 모두가 오랫동안 외면했지만, 정작 존 포드 자신은 숱한 대작들을 제치고 자신의 가장 사적인 영화이자 가장 아끼는 영화 중 하나로 손꼽은 작품.

 

- 이 영화를 예찬하는 비평가와 연구가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최대의 장점은 생동감과 운동감이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영화의 잘 거론되지 않는 진정한 진가는 캐릭터간의 대화 씬에 있다고 생각.

 

일반적인 고전기 헐리웃 스타일 데쿠파주는 설정 샷 한번 잡아주고, 대화하는 두 인물의 얼굴을 바스트샷이나 클로즈업으로 한번씩 잡아주는 공식이 기본인데, 이 영화는 그런 것도 없이 대화하는 두 인물을 허리 높이 정도에서 잡고, 대화가 끝날 때까지 현란한 카메라워크나 구도의 변화도 없고, 심지어 다른 샷이 거의 끼어들지도 않음.

 

그런데도 그저 자연스러우면서도 위트있는 대사, 인물의 섬세한 제스처와 시선 처리, 그리고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기 좋은 구도를 설정하는 것만으로도 등장인물의 감정선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힘있고 아름다운 대화 씬을 너무나 스무스하게 연출해버림.

 

- 이 영화 최고의 대화 씬을 꼽자면 (1) 초반부 워드 본드와 벤 존슨이 나무를 깎으며 흥정하는, 하스미 시게히코가 극찬했던 장면, (2) 마차 행렬을 따라가고 싶어하는 해리 캐리 주니어가 벤 존슨을 설득하는 장면, (3) 그리고 중반부 이후 벤 존슨이 조앤 드루에게 청혼하는 장면까지 총 3개인데, 특히 마지막 청혼 장면은 아마도 제가 지금까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돌려본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이 영화에서 조앤 드루가 연기한 덴버는 제가 이제껏 봤던 가장 매력적인 영화 속 히로인 중 하나.

 

- 워너에서 출시한 블루레이가 유일하기에 따로 포맷을 추천드릴 것도 없지만, 영자막이 노란색이라는 점과 서플먼트가 전~혀 없다는 점이 참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