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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물리매체(BD, DVD 등)

고전영화 블루레이&DVD 이야기 1. - 물리매체 소장의 이점

 

 

왜 물리매체인가? - 물리매체 소장의 이점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완연히 보급되는 이 시점에 "왜 굳이 물리매체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전영화의 경우, 최근에는 유튜브나 네이버 영화 등지에서 매우 다양한 유료 다운로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여차하면 VPN까지 써 가며 크라이테리언 콜렉션 등의 해외 OTT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편당 몇백원만 내면 인터넷 브라우저로 바로 볼 수 있는데 굳이 편의성에서 크게 떨어지는 물리매체를? 이라고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재밌게도 이런 "광학디스크 물리매체는 죽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햇수로 거진 십몇년이 되어가지만 물리매체 시장은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는데, 이것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으로 대표되는 고전영화 전문 레이블입니다. 국내에는 크라이테리언만이 잘 알려져 있지만, 요즘은 이런 고전영화 전문 레이블이 시장 전반적으로 엄청난 상향평준화를 이룬 상태인데요. 당장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유레카 엔터테인먼트 같은 역사 깊은 회사 외에도, 올리브 필름스, 애로우 비디오, 키노 로버, 인디케이터 등등 수많은 레이블이 크라이테리언에 전혀 뒤지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능가하는 퀄리티의 컬렉션을 발매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특정한 고전영화를 몇 번씩이나 볼 정도로 좋아하고, 그 영화를 좋은 퀄리티로 보고 싶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정보를 알고 싶고, 언어의 장벽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다면, 고전영화를 블루레이 등의 물리매체로 소장하는 것은 아주 좋은 선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하의 내용에서는 제가 직접 수집하면서 느낀 고전영화 물리매체 소장의 이점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사진: 올리브필름스와 유레카 엔터테인먼트에서 출시한 <말 없는 사나이> 블루레이 판본)

 

1. 영상의 퀄리티

 

존 포드의 1952년작 <말 없는 사나이The Quiet Man>를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위의 캡쳐에서도 나오듯이, <말 없는 사나이>는 영국 유레카 엔터테인먼트, 미국 올리브필름스 등 여러 회사에서 각각의 버전으로 복원한 블루레이 디스크를 판매하고 있지만...

 

 

네이버 영화에서 판매하는 <말 없는 사나이> 영상 파일 정보. 보시다시피 최고 화질이 480p이고, HD 이상은 아예 제공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말 없는 사나이>의 네이버 제공 미리보기 영상에서 캡쳐한 장면인데, 단순히 해상도만 낮은 것이 아니라 화질이나 색감 등 전반적인 영상의 퀄리티가 매우 낮고, 자막에도 오탈자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VHS를 보정이나 복원 없이 그대로 따온 듯한 끔찍한 영상 퀄리티로 악명높았던 아티비전 사의 <말 없는 사나이> DVD를 모 국내 리핑사가 복제해서 판매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과 같은 영상 소스가 아닌가 싶네요.

 

 

 

현재 소장 중인 올리브 시그네이쳐의 <말 없는 사나이> 블루레이를 직접 캡쳐해봤습니다. 원본 필름을 4K 소스로 리마스터링한 후 1080p로 압축해서 발매했기 때문에, 기존의 복원 전 영상과는 거의 다른 영화 수준으로 차이가 납니다.

 

 

화질 이상으로 큰 문제는, 웹 버전 영상 중에서는 아예 영화의 배율 자체가 달라진 작품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시의 영화는 윌리엄 A. 웰먼의 1954년작 <Track of the Cat>인데요. 위쪽이 2005년 파라마운트에서 발매한 DVD에서 추출한 캡쳐이고, 아래가 1080p 웹버전인데, 말이 1080p이지 DVD 버전과 큰 화질 차이도 없고, 배율도 시네마스코프 2.35:1에서 1.85:1로 잘려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이용한 인물의 배치와 화면의 구성 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인데, 그런 작품에서 화면비가 잘려나갔다면 감상에 큰 지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DVD나 블루레이 등의 물리매체는 이러한 원본의 보존 면에서도 웹 버전에 비하면 훨씬 신뢰성이 있지요.

 

단순히 고전영화를 원본에 가까운 좋은 퀄리티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고전영화 타이틀 소장은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 20세기폭스사에서 출시한 <Ford at Fox> 컬렉션. (출처: dvdbeaver)

 

2. 소장가치 높은 서플먼트

 

DVD 시대 이후, 물리매체는 소비자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영화 본편 영상 외에도 다양한 추가 서플먼트를 제공해 왔습니다. 감독, 배우 등의 현장 참여자 또는 영화 연구가 등의 해설이 담긴 코멘터리나 인터뷰 영상, 감독이나 배우의 인터뷰 영상이나 그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종이 부클릿이나 비디오 에세이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추가된 영화 연구가들의 분석과 해설, 심지어 여러 개의 판본이 존재하는 작품은 그 여러 판본을 한 타이틀에 넣기까지 하는 등…정말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서플먼트가 존재합니다.

 

십수년 전 홈비디오 시장의 대세가 VHS에서 DVD로 넘어가던 시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혁명이었기 때문에, 고전영화의 저작권을 직접 소유한 워너, 폭스, 파라마운트 등의 거대 영화사에서도 앞다투어 직접 엄청난 퀄리티의 서플먼트를 보유한 타이틀을 출시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던 것이 20세기 폭스에서 출시한 <Ford at Fox> 컬렉션인데요. 존 포드가 폭스에서 제작한 24편의 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Directed by John Ford>, 영화 스틸컷과 실제 촬영 현장 사진이 담긴 165P 분량의 사진집, 1920년대 당시의 것을 재현한 브로셔 등이 PS4 본체보다도 큰 케이스에 담겨서 나오는 엄청난 타이틀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거대 영화사들의 소장가치 높은 고전영화 타이틀 출시 풍조는 DVD에서 블루레이로 시장의 대세가 넘어오면서 크게 시들해졌는데요. 물론 본편 영상의 경우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복원했지만, 서플먼트의 경우는 퀄리티의 개선 없이 SD 화질 그대로 삽입하거나, 심한 경우는 아예 삽입조차 안 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에디션 정보. 2009년 파라마운트에서 발매한 센티널 에디션 DVD에서는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코멘터리, 존 포드의 손자의 코멘터리, 5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등의 풍부한 서플먼트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2012년 출시한 블루레이에서는 이런 서플먼트 없이 영화 본편만이 수록된 상태로 출시되었습니다.)

 

블루레이 시대로 넘어오면서 거대 영화사에서 직접 소장가치 높은 고전영화 타이틀을 출시하는 경우는 드물어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고전영화 타이틀의 소장을 원하는 수요층이 형성되고, 이런 회사의 원조격인 크라이테리언 외에도 수많은 고전영화 타이틀 전문 회사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지금도 꾸준히 다양한 서플먼트가 추가된 질 좋은 타이틀을 출시해주고 있습니다.

 

 

(사진: 인디케이터에서 출시한 버드 뵈티커-랜돌프 스캇 박스셋 컬렉션 <Five Tall Tales>)

 

그 예시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회사가 영국의 인디케이터(Indicator)인데, 이 회사에서는 콜럼비아 사에서 제작한 필름 누아르, 존 포드가 콜럼비아 사에서 만든 4편의 영화 박스셋, 조셉 폰 스턴버그-마를렌 디트리히 등의 유명한 감독-배우 콤비가 함께 한 컬렉션, 해머 필름 프로덕션의 호러영화 컬렉션 등 다양한 테마의 소장가치 높은 컬렉션을 거의 한 달에 1~2번 페이스로 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아끼는 것이 2018년에 출시되었던 버드 뵈티커-랜돌프 스캇 컬렉션 <Five Tall Tales>인데요. 뵈티커는 그 위대함과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영화 교과서에서는 이름조차 찾아보기 힘들고, 지금은 옛날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70여 년 전의 감독인데, 그런 감독의 컬렉션조차도 위의 사진에서 보실 수 있듯이 현역 스타 감독이나 배우의 컬렉션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최상의 퀄리티로 출시하고 있습니다.

 

 

(사진: 키노 로버에서 2020년 출시한 존 포드의 <Straight Shooting>과 <Hell Bent>.)

또 하나 소개해드리고 싶은 회사가 미국의 키노 로버(Kino Lorber)인데, 이 회사에서는 작년에 깜짝 놀랄 만한 타이틀 2개를 출시했습니다. 바로 존 포드가 1910년대에 감독한 2편의 무성영화 <Straight Shooting>과 <Hell Bent>인데요. 이 영화들은 대부분의 무성영화가 그렇듯이 존재했다는 기록만 남고 프린트는 유실된 것으로 여겨저 왔었지만 2000년대 중반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린트가 발견되면서 복원되고 지금까지 몇몇 영화제에서만 상영되었는데, 그런 작품이 1080p로 복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용 영화음악까지 새롭게 작곡되어서 삽입되었고, 코멘터리와 부클릿 같은 서플먼트까지 추가되어서 부활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해드렸듯이, 최근의 고전영화 물리매체 시장은 인디케이터처럼 비교적 역사가 짧은 신생 레이블조차 저런 퀄리티 높은 컬렉션을 정기적으로 출시할 정도이고, 존 포드의 1910년대 작품처럼 출시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타이틀까지 복원해서 출시되고 있습니다.

 

이들 외에도 다양한 국가의 수많은 회사들이 이와 같은 질 좋은 타이틀을 지금도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는데, 좋아하는 고전영화를 잘 복원된 영상으로 수많은 서플먼트와 함께 감상하고, 소장가치 높은 형태로 수집하고 싶다면 아마도 지금만큼 좋은 시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오슨 웰즈의 <악의 손길>)

 

3. 판본의 문제

 

최근 영화계 최대의 이슈는 '스나이더컷'으로 불리는 잭 스나이더의 재편집본 저스티스 리그일텐데요. 영화는 기본적으로 편집의 예술이고, 현장 최고책임자인 감독의 원 의도와 제작자, 영화사와의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잦은데다가, 저스티스 리그의 경우처럼 제작 도중에 상상도 못한 이슈가 발생해서 영화를 갈아엎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양한 판본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어떤 판본을 볼 것인가?'라는 고민이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고전영화의 경우, 그 중에서도 60년대 이전의 미국영화의 경우는 감독에게 최종 편집권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이런 판본의 문제는 더욱 골치아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판본의 문제를 대표하는 작품을 꼽자면 역시 오슨 웰즈의 <악의 손길Touch of Evil>입니다. 이 영화의 편집과 판본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글 하나를 따로 써야 할 정도로 길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현존하는 <악의 손길>의 판본은 유니버셜에서 다른 연출자를 기용하여 추가촬영하고 재편집한 108분 분량의 가편집본, 이후 여기서 15분을 덜어내서 극장개봉한 93분 버전의 개봉판, 이후 1998년 웰즈가 자신의 제작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유니버셜에 보낸 서한과 여러 편집자, 연구가들이 협력하여 새롭게 재편집하고 복원한 112분 분량의 복원판이 있습니다.

 

 

(사진: 유니버셜에서 출시한 <악의 손길> 50주년 기념 복원판과 유레카 엔터테인먼트의 버전)

다행스럽게도 최근의 물리매체에서는 고전영화 소비자들의 요구에 응하여, 이런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는 영화의 경우에는 한 타이틀에 여러 판본을 모두 삽입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악의 손길>의 경우, 유니버셜에서는 위의 복원판, 개봉판, 가편집본 3가지 버전을 모두 삽입하고, 여기에 웰즈가 유니버셜에 자신의 제작의도를 설명한 58페이지 분량의 서한까지 부록으로 추가한 엄청난 타이틀을 "50주년 기념 에디션"이라는 이름을 달고 발매했습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2011년 영국 유레카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오리지널 필름의 화면비인 1.33:1과 극장 개봉시의 화면비인 1.85:1 버전을 따로 구분한, 무려 여섯 가지나 되는 버전을 수록한 타이틀을 출시하기에 이릅니다.

 

 

(사진설명: 존 포드의 <My Darling Clemetine>에 수록된 103분 가편집본 버전, 그리고 두 버전의 차이를 설명하는 인터뷰 서플먼트)

 

또 하나 예를 들면 존 포드의 <My Darling Clementine>가 있는데요. 이 영화의 기존에 알려진 97분 버전은 본래 존 포드가 비공개 시사회에서 내놓은 가편집본에서 일부 재편집과 재촬영을 거쳐서 극장개봉한 판본이지만, 이후 90년대에 UCLA 필름&TV 아카이브에서 103분 분량의 개봉 전 버전의 프린트가 발굴되어 복원 작업을 거쳐 공개되었는데,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에서 출시한 타이틀에서는 이 두 버전과 함께 복원 담당자인 톰 기트의 인터뷰까지 수록해서 두 버전의 차이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악의 손길>이 무려 여섯 가지 버전으로 복원되어서 출시된 것이나, 상당수의 장면과 대사는 물론이고 결말부의 쇼트도 완전히 다른 <My Darling Clementine>의 두 가지 버전이 모두 출시된 것이나, 고전영화의 다양한 판본을 온전하게 보고 싶다는 소비자의 수요가 없었다면, 그리고 이러한 수요를 충족해주는 매개체인 DVD와 블루레이 등의 물리매체가 없었더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겠죠.

 

영화는 연출 담당가인 감독뿐만 아니라 제작자, 영화사, 각본가, 연기자 등 수많은 사람들의 의도와 이해관계, 심지어 우연마저 반영된 결과물이고, 그에 따른 수많은 판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엇이 오리지널인가?' '무엇이 가장 나은 판본인가?'라는 질문은 감독은 물론이고 직접 제작과 연출에 참여한 당사자들도 답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영화라는 장르의 근본에 맞닿은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의 해답은 관객 각자가 가능한 한 많은 판본을 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판본을 자신만의 오리지널로서 고르는 것밖에 없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사에게 극장개봉판으로 선택받지 못한 다른 판본까지도 제공하는 블루레이, DVD 등의 물리매체는 이러한 관객들의 갈증을 충족시켜주고, 연출과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의도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